2023. 4. 26. 08:07ㆍ예배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Yes it is, Lord.)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15:21-28)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영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이 질문 속에서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이 스스로 있어야 합니다.
여기 넘어설 수 없는 상황이 있지 않습니까.
마가복음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나오는 이방 여인, 가나안 여인입니다. 예수님과 문화권이 달랐고 예수님과 성별이 달랐고 그래서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22절)
여러분 성경에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시던가요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도 대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시지 않자 이제 하다못해 제자들이 나서서 이 자꾸 소리 지르는 여인을 좀 어떻게 해달라고 간청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23절)
예수님께서 너와 나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단호하게 표현을 하십니다. (24, 26절)
근데 여러분 이 여인은 그 상황을 다 받아들입니다.(27절)
여러분 체념, '아무것도 안 되겠네. 그냥 다 내려놔야겠네.' 이런 체념의 내려놓음이 아니라 상황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체념이 아니라 '내가 이런 상황이지만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나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게 믿음의 받아들임 자세라는 거죠.
자기의 어려움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상황을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지만-
'맞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저는 이방 여인이고 맞습니다. 저의 딸은 귀신 들렸고 저는 정말 비참한 사람이지만 주님 말씀하시면 나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 손 붙잡아주시면 일어설 줄 믿습니다.'
이게 믿음의 받아들임입니다.
두 번째 이방인 여인이 받아들인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의 양을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들을 향해서 개라고 표현하신 것은 참 어떻게 보면 잔혹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27절)
여러분 이런 마음을 마주했을 때 여러분들도 그런 사람들 만날 때 있지 않습니까.
나를 우습게 보고 나를 낮춰보고 뭔가 교만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가 멘탈이 흔들립니다.
근데 이 여인을 보십시오.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 이 이방인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넘어지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거는 어떤 말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 계신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말씀을 하시든 그 말씀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다 알아듣는 것도 있지만 못 알아듣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헷갈리는 것도 있죠. 근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기적 같은 거 어떻게 다 쉽게 믿어지겠습니까. 처음 교회 나오신 분이 홍해를 갈랐대, 오병이어가 있었는데 떡을 나눠줬더니 다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나왔대 이거를 어떻게 쉽게 받아들이겠어요.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완전한 신이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구주로 나의 구주로 믿으면 그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이 여인을 보세요. 예수님이 이보다 천만 배 센 말씀을 하셔도 이 여인은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요. '예수님 저는 그 정도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 정도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압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를 낫게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이 믿음을 능력의 주님, 사랑의 주님을 확신을 갖고 믿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성경에서 아주 드물게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단 사람이에요.(27절)
여러분 얼마나 귀한 믿음의 자세입니까. 부인하고 리젝트,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서 부드럽게 나가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주님 맞습니다.'
이게 뭐예요? 맞습니다. 이게 받아들이는 자세예요. 맞습니다가 우리 어렵게 말하면 뭐예요? '아멘'이에요. '주님, 하나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멘' 해야 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 죄인을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부족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개입니다. 그런데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아무것도 아닌 거라도 저에게 제발 베풀어 주십시오.'
여러분, 아멘을 우리가 어디서 합니까? 예배의 자리에서 하지 않습니까.
예배의 자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내가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이 여인에게 지금 여기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 말씀하시고 나서 어떻게 이어져 갑니까? '참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를 너희가 드리게 될 것이다.'(요 4:23) 예배로 이어가시죠. 이 여인에게 예배의 자리가 되어서 주님의 그 말씀을, 그 아픈 말씀까지도 받아들이고 그래서 이 여인은 마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수용했습니다. 날카로움을 받아들였고 믿음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받아들이겠냐라고 묻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겠냐라고 오늘도 묻습니다. 이 십자가를 받아들이겠냐라고 묻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부끄러운 것인데 이 십자가를 받아들이겠느냐라고 묻습니다.
내게 주신 이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내 연약함과 내 한계와 내 달란트와 내 은사와 내 능력을 다 받아들일 것인가. 내 가정을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끊임없이 부인하고 밀어내고 그렇게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여인처럼 귀신 들린 딸이지만 받아들이고 주님 앞으로 가져 나올 것인가.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은 우리 삶에 있는 연약함과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그곳에 주의 능력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냥 더 큰 꿈만 꾼다고 비전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삶을 내게 주신 것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받아들이는 거죠. 그리고 거기서 꿈을 꾸고 거기서 소망을 갖고 거기서 온전하신 주님을 붙잡을 때 우리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고 또한 주의 은혜가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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