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마) 16:21-14 진면목(眞面目) (2023.02.04 뉴송J)

2023. 2. 12. 07:24예배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
(마태복음(마) 16:21-14)

아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제가 이렇게 우리 교회 청년부에서 설교를 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하루하루를 여러 가지 의미에서 꿈만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제가 청년부 리더분들을 면담을 하면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진짜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할까, 힘들어할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우리의 진면목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진면목(眞面目)이란, 한자어로 참 진 얼굴 면 눈 목 자를 써서 그 의미는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라는 의미를 말합니다. 이 뜻을 쉽게 말하면 '꾸며지지 않는 진짜 내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진면목입니다.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에 '진면목을 보여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 뜻은 '어떤 사람의 이전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사람의 진짜 가치 진짜 실력을 볼 수 있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문화와 우리의 성격까지도 형성해하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언어인지학 교수인 Lera Boroditsky라는 교수님께서 테드에서 이런 강연을 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언어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강의를 하셨는데요, 그러면서 몇 가지 예로 들은 것이 있습니다. 

Ref. How language shapes the way we think | Lera Boroditsky(2018.05.02), Youtube

첫 번째(동영상 02:29)로 호주에 있는 크루세이오르 부족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부족은 너무나 신기하게도 우리는 오른쪽 왼쪽으로 방향을 나타내는데 여기는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얘기한대요.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아니면 '뭐 식사하셨어요?' 이렇게 인사를 하는데,
부족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인사하는 것이 '어디로 가고 계세요?"라고 인사를 한대요.
그래서 이 부족 사람들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단 하루도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지 언급하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해요. 

두 번째(동영상 04:40)로 그 교수님이 얘기하시는 거에는 언어에 따른 시간 개념의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사진을 주고 이것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 보세요.'라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나열하죠?
가장 과거에 있었던 일을 주로 왼쪽에 놉니다 (=======>)
못 믿으시겠죠? 여러분 한번 제 질문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제 점심에 뭐 드셨나요. 생각해 보세요. 생각을 마치셨나요. 혹시 특징을 발견하실 수 있으셨습니까?

우리는 과거의 일을 생각할 때 주로 왼쪽 위를 바라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랑 그를 반대 방향으로 쓰는 나라가 어디 있죠? 아랍권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고요.
아랍권에 있는 나라는 그를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씁니다. (<========)
정말 신기하게도 그 아랍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주면서 '이 사건을 시간순으로 나열하세요'라고 하면 그들은 과거를 오른쪽부터 논다고 해요. 

 

세 번째(동영상 08:02)로 언어가 가지는 문법적 차이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 대요. 

여러분 우리나라 언어는 그렇지 않지만 외국의 언어들을 보면 가끔 명사에 여성형 명사 남성형 명사가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태양을 여성 명사/ 스페인에서는 태양을 남성 명사로 분류를 합니다. 
과연 여기서 어떤 차이가 생길까요. 독일 사람과 스페인 사람에게 다리에 대해서 한강 다리 같은 그런 다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세요라고 하면 독일 사람들은 아름답다 우아하다 등의 여성성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페인 사람들에게 그 다리에 대해 설명해 보세요라고 하면

그들은 크다 강하다 두껍다 등의 남성적인 표현을 쓴다고 합니다. 
이 차이는 바로 독일어에서 다리는 여성형 명사이고 스페인에서 다리는 남성형 명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물을 인식하는 것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영향을 받습니다. 

 

마지막(동영상 09:00)으로 어떠한 사건을 묘사하고 기억하는 것도 언어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여기 있는 컵을 깨뜨렸다고 생각해 볼게요 이걸 깨뜨렸어요. 
그러면 미국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표현하냐 하면 그 사람이 그가 이 유리컵을 깨뜨렸다고 표현을 합니다. 
앞에 누가 깨뜨렸냐를 강조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들은요 그 컵이 깨졌다고 표현을 한다고 합니다. 
누가 깨뜨렸나 보다는 어떤 것이 어떤 일을 당했냐에 대해서 좀 더 주목한다는 것이죠. 
이처럼 언어가 다르면 우리가 주목하는 대상도 달라지고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 역시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신기하게도 어떠한 사건이 시간이 지난 다음에 미국 사람에게 물어보면 누가 그 일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누가 그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언어에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욜로라고 들어보셨나요? 아니면 워라벨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의 뜻은 '당신의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 당신의 인생을 즐겨라'입니다. 
워라벨(Work-life-balance)은 '당신의 인생은 소중하니 일과 삶의 균형을 갖고 당신의 삶을 잘 즐겨라'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요,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그 주체가 모두 나 자신이라는 겁니다.

 

'너의 삶을 살아라 너의 삶은 소중하니까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너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라.'

'자아실현이 중요하다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삶의 어떤 목표가 되어야 한다.'

'너의 삶의 질을 높여라 내 삶의 주인은 너다 네 삶의 주인공은 너다.'

이 말들을 들을 때 어떻습니까?

 

세상의 언어는 이렇게 우리를 그럴듯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언어는 우리가 잘살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언어는 너 자신을 위해 살아가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우리는 진짜 나의 모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세상의 언어는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진짜 모습을 우리가 찾기를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의 언어는 

내가 비춰주는 세상이 비춰주는 그 모습이 진짜 너의 모습이라며 우리를 기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언어 말고 어디에서 우리의 진짜 모습 우리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을까요?
세상의 언어와 반대편에 서 있는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유일한 참된 언어이자 사랑의 언어인 하나님의 언어는 세상의 언어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그 길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길에서 만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가요?

창조주이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셨고

우리의 죄와 우리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님의 길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비참하고 잔혹하고 처참하게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언어는 나만 보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어는 하나님을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게 만듭니다.
세상의 언어는 널 위해 살아가라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언어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라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언어가 아닌 그런 하나님의 언어를 따라 살아갈 때 그 길을 따라갈 때 

우리는 진정한 우리의 참된 모습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의 언어를 따라서 간 길에서 만나게 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요?
창세기 1장 27절 말씀처럼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과 같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틀렸습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우리의 진짜 모습은요 너무나도 비참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지만, 죄악으로 인해 처참하게 깨지고 부서지고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더럽고 추악하고 볼품없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봤을 때 우리는 상당히 실망합니다. 두렵고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곧 건드리기만 해도 모두 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끔찍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진면목입니다. 우리의 진짜 모습입니다. 
그 모습 앞에 서면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언어가 만들어낸 게 거짓되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멋있어 보이는 행복해 보이는 뭔가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그 모습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언어에 따라가서 만난 그 볼품 없고 초라하고 죄악 된 내 모습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모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우리의 믿음은 우리에게 죄인 된 우리의 모습을 끌어안게 합니다. 그것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죄인 된 우리의 모습을 선택하고 받아들이고 끌어안을 때 

우리가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런 모습을 안고(hug)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곧 무너질 것 같은데 무너지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 예수님께서 다 부서져 가는 내 모습을 꽉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 누군가가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 채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봤을 때 너무 답답해 보여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밧줄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답답해서 그 사람에게 가서 '제가 이 밧줄을 좀 풀어드릴까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람이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는 묶여 있지 않는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제가 어디가 묶여 있어요?!'

라고 얘기하면 제가 그 사람을 풀어줄 수 있을까요?
자신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풀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가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9:12, 막2:17, 눅5:31)

하나님의 언어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는 언어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죄 된 우리의 모습을 붙잡고 계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된 그 모습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언어를 따라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 구원을 갈망하는 자들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럼 이제 세상의 언어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우리에게 닥칠 일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말이 통하지 않는 그리고 그 언어를 배우기 쉽지 않은 그런 나라에서

내가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떠신가요? 아마 살아가다 보면 굉장히 답답할 거예요. 
모든 것들이 어렵고 모든 것들이 답답하고 모든 것들이 힘들고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조리한 일 불합리한 일들을 당하기에 십상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들이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억울한 일은 뭔지 아세요?
어디 가서 내 억울함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언어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우리가 겪어야 할 일들이 바로 이러한 일들입니다. 
그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고 그들과 문화가 공유되지 않아서 답답해하고 어렵고 

그들은 나를 끝까지 이용하려고만 하고 부조리한 일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어디 가서 이야기할 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나는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야 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바로 이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통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어로 살아가는 것

바로 우리가 세상 가운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의 언어를 쓰면서 살아가면서

그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고

그들에게 맨날 당하기만 하고 억울하고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는 우리을 하나님께서는 교회로 모아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해 주시고 그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언어로 함께 나눌 수 있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서로 나눕니다. 
저는요, 우리 청년부 공동체가 그런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청년부에 나오면 나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고 나랑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말했을 때 내 말에 '그렇구나.'라고 긍정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내가 그곳에 갔을 때 청년부에 있을 때만큼은 세상에서 가지는 그 두려움이 없는 곳.

청년부 모임에 왔을 때만큼은 내가 세상이 주는 괴로움과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곳.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고 자유로움이 주어지는 곳.

바로 우리 청년부 공동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찬양: 내 모습 이대로-제이어스

내 모습 이대로 사랑 하시네 연약함 그대로 사랑 하시네
나의 모든 발걸음 주가 아시나니 날 인도 하소서
주의 날개 아래 거하는 것 주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
나의 가장 큰 소망 나의 가장 큰 은혜
주와 함께 동행하는 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청년부 공동체가 우리 청년부가 하나님의 언어를 사용하는 곳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가운데 힘이 들어서 괴로워서 어려워서 이곳을 찾는 모든 이에게 위안이 되는 곳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언어로 살아가느라 힘들고 지친 영혼들이 이곳에 나와서 평안을 얻고 위로를 얻고 돌아가는 곳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또한 이곳이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곳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돌아가는 곳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예수님을 만나고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곳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난 죄인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그러기 때문에 나는 더욱 구원을 갈망합니다.
하나님 나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날 놓지 말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나를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외칠 수 있는 청년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그렇게 우리가 세상 가운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의 진면목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어떠한 가치를 가졌는지, 어떠한 능력이 있는지, 어떠한 힘이 있는지, 그들이 비로소 우리의 진면목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우리 청년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걸 주님께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명성교회 NEWSONG J 청년부 말씀 [23.02.04] 이경환 목사 (2023.02.04),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