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 22 (시편 22편)

2023. 7. 11. 03:09성경읽기/시편(2023.01.18 ~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22: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시22:11)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22:10)

메시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메시아 파송으로 완성된다. 예수께서는 시편이 이 메시아를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하셨다. (눅24:44) 시편 22편과 69편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수난 시편(Leidenspsalmen)으로 고백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시편 22편의 서두를 따라 기도하시며 그것이 자신의 기도임을 분명히 하셨다. 히브리서 2장 12절은 시편 22편 22절을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으로 삼는다. 그리고 시편 22편 8절과 18절은 예수의 십자가형을 직접 예언한다. 이 시편은 일찍이 다윗 자신이 고난을 받으면서 기도로 바친 것이지만, 이는 그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고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박해을 당한 왕으로서, 그리스도의 선조로서, 그리스도를 제 안에 품은 자로서 그러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기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시고, 그 의미에 충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여기셨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만 이 시편으로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우발적이고 사적인 고난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닥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의거해 이 시편으로 기도한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더불어 기도하시는 음성을 들으며, 또한 그분을 통하여 저 구약성경의 왕이 기도하는 음성도 듣게 된다. 그 깊이를 온전히 헤아리거나 경험하진 못하지만, 우리는 이 기도를 따라 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ref. 디트리히 본회퍼, 성경의 기도서-시편 개론, 복 있는 사람, p33-34
이사야서와 마찬가지로, 시편은 이 오래 기다려 온 약속이 오로지 아주 강렬한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고 또한 성취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듯 보인다. 몇몇 사람이 확신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처럼, '수난' 시편이 동시에 '제왕' 시편으로 의도되었는지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은 비통함으로부터 시작해서 결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영광스러운 비전으로 끝나는 위대한 시편 22편은 그것을 그렇게 볼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준다...
2편이나 110편과 같은 시편은 개별적으로 살펴본다면 정말로 지나치게 승리주의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시편을 좀더 큰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모든 일반적인 왕은 그들 자신의 적절치 못한 행동이나 혹은 그보다 더 심각한 잘못으로 발생한 어려움에 직면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회개가, 저기에는 고난이 있다. 오직 그로써만 더 큰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우리가 시편을 하나의 전체로 보면서,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교차하고, 또한 과거 다윗 왕조와 장차 올 하나님나라가 교차하는 그 복잡다단한 지점에 서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이 시편의 시들이 그 자체로 종말론적 긴장을 표현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정확하게 바로 거기에 서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ref. 톰 라이트, 땅에서 부르는 하늘의 노래_시편, IVP, p81-84

묵상
3주간 첫 문장은0000는 묵상이었다. 어떻게 묵상해야 할지, 내가 잘하고 있는지, 누구라도 도와달라고 소리도 치고 싶은데, 인사조차, 내가 있는 것 조차 싫어할까.. 왜 이런 생각들이 멈추지 않을까. 그냥 하나님께 외친다. 하나님 도와주세요(이런 못난 마음을).. 그런데 실질적인(직접적인) 도움 좀 주시면 안될까요? 저 좀 잡아주세요..(나는 참.. 이기적이다 진짜)
매일 흔들리는 마음 가운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줌으로 교회 공동체에 Lean on me(you), 붙잡아주신 시간이 있었고, 주일 말씀을 듣고 내가 저런 사람이구나...하며 두려움에 가슴이 떨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입만 살아 있는 신앙인이라... 두려웠다. 어떻게 너가 하나님 일을 할 수 있어? 라는 말로도 다가오면서/ 또 한번이라도 복음으로 살아봐 라는 도전으로도 다가온다. 주님이 주신 마음을 분별하게 도와주세요.)

최근에 한 신앙공동체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내가 왜 이런 것들을 하고 있을까?>> 나는 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할까?>> 내가 지금까지 한 것 중에 오랫동안 한 게 뭘까?(잠자기, 미루기, 영상보기 말고).. 돌아돌아 생각해보면 '왜 나는 예수님을 믿을까?' 라는 고민의 가지들을 던지며 살았구나 생각한다. (그냥 생각이 많다.) 내가 여전히 답변하기 어려운 게 많지만 그 중 하나는 '왜 교회에 나와요?' 이다.
내가 존경하는 A 목사님께 물었는데- 사영리로 답변해주셨다. '기본으로 돌아가야지. 인간은 죄인이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예수님이 필요하다. 그분은 날 대신해 죽으셨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나를 자녀 삼으셨다. 예배는 믿는 자들이 모여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표시이다.'
벽 없이 어떤 질문이든 들어주겠다는 B 전도사님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고 예배드리는 것'이라고 구약까지 안 가도 신약으로도 답변할 수 있다고 말씀해줬다. (내가 구약의 출애굽부터 설명하려고 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진짜 '나의' 마음으로 고백되어지는 답변을... 찾고 싶었다(나의 하나님~ 나의 일상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누리고 싶어요 God finder!!).  최근에 또 비슷한 질문을 받으며 머리가 하애지는 경험을 다시한다... 그리고 다시 받은 질문에 내가 드린 고백은 '십자가를 기억하고 감사해서 그 분께 예배 드리기 위해 나와요'

천국은 대가만 바라는 사람이 갈망하는 것들을 하나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할 테니 말입니다... 사랑한다면 그 대상을 즐기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평신도로서 조심스레 말하건데, 저는 "하나님은 자신을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선으로서 사랑하신다. 만약 하나님 자신보다 더 선한 것이 있었다면 자신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셨을 것이다"라는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높은 존재로부터 가장 낮은 존재에 이르기까지 자아는 드려지기 위해 존재하며, 그렇게 드려질수록 진정한 자아가 되고, 그 결과 더 드리게 되는 과정이 영원히 계속 됩니다.
ref.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홍성사 p224,235

22편은 첫문장 부터 고통스런 순간, '왜 이 세상에 고통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올지 모른다. 그럴때  C.S.루이스는 '기독교는 왜 있는가?'라는 선질문을 던지라는 답변을 토대로,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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