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4. 18:28ㆍ독서
'용서하는 사람 마음은 어떤거야'
용서는 비난의 악순환을 끊고 죄책감의 중압을 덜어 준다. 용서하는 자를 가해자와 같은 편에 놓는 놀라운 연계를 통해 그 두 가지 일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용서를 통해 자신이 생각만큼 가해자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시몬 웨일은 말했다. “나라는 존재도 실은 생각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용서다.”
나는 이 장 첫머리에서 제프리 다머 사건을 중심으로 용서에 대해 소그룹 토의를 벌인 이야기를 했다. 그런 토의가 흔히 그렇듯이 그날의 대화도 각자의 실생활 사례를 벗어나 자꾸만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쪽으로 겉돌았다. 다른 혐오 범죄들 이야기며 보스니아, 나치 대학살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다 우연히 ‘이혼’이란 말이 나오자 레베카가 불쑥 입을 열어 다들 깜짝 놀랐다.
레베카는 조용한 여자로, 함께 모인 몇 주 동안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혼 이야기가 나오자 자청해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레베카는 수련회 강사로 꽤 잘 알려진 목사와 결혼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남편에게도 추한 면이 있었다. 포르노를 뒤적거리는가 하면 타지로 출장을 가서 창녀를 찾곤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레베카에게 용서를 구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그는 레베카를 버리고 줄리안이라는 여자에게 갔다.
레베카는 목사의 아내로서 그런 모욕을 당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남편을 존경하던 일부 교인들은 목사의 성적 타락이 부인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 레베카를 대했다. 레베카는 망연자실하여 점점 사람과의 접촉을 꺼리게 되었다. 사람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을 마음속에서 떨치려 했지만 자녀 방문권 문제로 꾸준히 접해야 했기에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레베카는 자기가 전남편을 용서하지 않는 한, 복수의 응어리가 아이들에게까지 전해질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몇 달 동안 기도했다. 처음에는 기도도 시편의 어떤 기도처럼 복수심에 찬 듯했다. 하나님이 전남편에게 ‘받아 마땅한 것’을 주시기를 구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받아 마땅한 것’을 결정할 권한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레베카는 전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떨리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한 일을 다 용서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어요. 줄리안도 용서하겠어요.” 그러나 그는 잘못을 인정하는 기색조차 없이 레베카의 말을 웃어 넘겼다. 비록 상대가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날의 통화는 레베카가 묵은 원한을 털어내는 데 도움이 됐다.
몇 년 후 레베카는 남편을 ‘훔쳤던’ 여자 줄리안으로부터 이성을 잃은 듯한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줄리안은 남편과 같이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린 목회자 수련회에 참석중이었는데, 남편이 잠깐 산책을 하고 온다며 호텔 방을 나간 지 몇 시간 후 남편이 창녀를 찾아갔다 붙잡혔다는 경찰의 보고를 받게 된 것이다.
줄리안은 레베카와 통화하며 울고 있었다. “이제껏 당신 말을 믿지 않았어요. 설사 당신 말이 맞더라도 이제는 남편이 달라졌다고 애써 생각을 고쳐 먹곤 했지요. 그런데 이럴 수가. 너무 창피하고 속상해요. 죄책감도 들고요. 세상에 누가 내 맘을 알아 줄까요. 갑자기 당신이 우리를 용서한다고 말하던 그날 밤이 생각났어요. 어쩌면 당신은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더군요. 염치 없는 부탁인 줄 알지만,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바로 그 저녁 레베카는 줄리안을 집으로 초대했다. 둘은 거실에 앉아 같이 울며 배신의 사연을 나눈 뒤 끝으로 함께 기도했다. 줄리안은 그날 밤을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된 시간으로 꼽는다고 한다.
레베카가 사연을 털어놓는 동안 우리 그룹은 쥐죽은듯 조용했다. 레베카가 묘사한 용서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거의 불가해에 가까운 인간 사이의 연합—남편을 훔친 여자와 버림받은 아내가 거실 바닥에 나란히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하는—이었다.
레베카는 우리에게 말했다. “남편을 용서해 놓고도 오랫동안 왠지 나만 바보 같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날 밤 용서의 열매를 알게 됐어요. 줄리안의 말이 맞았어요. 나는 줄리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죠. 그리고 나 또한 같은 일을 겪어 봤기에 줄리안의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 돼 줄 수 있었어요. 두 사람이 한 남자에게 배신당했으니까요. 그 다음 내가 할 일은 줄리안에게 증오심과 복수심과 죄책감을 극복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었어요.”
루이스 스미즈의 『용서의 미학』에는 성경 속 하나님의 용서에도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점진적 과정이 있다는 특이한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첫 단계로 하나님은 죄로 인한 장벽을 제하심으로 죄인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되찾으신다. 그 다음, 복수의 권한을 버리시고 친히 그 몸으로 죄값을 치르신다. 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칭할’ 길을 찾으시며 우리를 향한 감정마저 좋게 바꾸신다.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녀의 모습을 보시기 위함이다.
스미즈의 통찰을 묵상하다 보니, 하나님의 용서라는 은혜로운 기적은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되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루어진 연계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그토록 사랑하기 원하시는 피조물 인간과 어떻게든 손을 잡으셔야 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체험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은 죄의 유혹 속에서 괴로운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셨다. 그래서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비로소 그것을 배우셨다. 직접 우리 입장이 되신 것이다.
히브리서에 이 성육신의 신비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고린도후서는 한걸음 더 깊이 들어간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고후 5:21)
이보다 더 명쾌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벌어진 곳을 메우셨다. 아예 우리 자리로 오신 것이다. 히브리서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입장을 아버지께 대변하실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땅에 와 보셨기에 모두 이해하시는 것이다.
복음서 기사로 보건대 용서는 하나님께도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예수님은 엄청난 대가를 생각하며 그렇게 기도하셨다.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었다. 이윽고 운명하기 전에 남기신 마지막 말씀 가운데 한마디.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로마 병사들, 종교 지도자들, 어둠 속으로 달아난 제자들, 여러분, 나, 모든 사람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인간이 되어 보심으로써만 진정으로 말씀하실 수 있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 가운데 살아 보셨으므로 이제 이해하시는 것이다
Ref. 필립얀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_제5장 왜 용서인가? 중에서, ivp, ePub (2021.01)
(너무 길게 책 본문을 가져와 문제시 줄이겠습니다.)
부모님과 할머니가 모인 저녁 거실, '사랑의 이해'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의 생생한 생각들은 다 사라졌지만.
남은 미련의 잔재들을 모아 작성해본다.
꼭 말하고 싶어서.
아빠는 주인공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엄마는 저 주인공 둘이 절대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그 시간에 종종 밥 달라거나 소리를 지른다.
가져온 영상 속 상황은 자신은 용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지 않을까 싶다. 자신은 끝까지 바람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는데, 자기가 아버지와 비슷한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용서라는 은혜의 기적을 소개한다. 결국 우리는 그들과 다를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것. 그리고 이런 우리를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값 없는 사랑. 아이의 눈에 맞춰주는 친구같은 어른. (다른 좋은 표현이 있겠지만 지금은 더 생각이 안난다. 그냥 저 책 읽어라.)
나를 만든 창조자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용서하셨을까.
우리 모두, 주님께 용서받은 사람으로 이웃을 상황을 나 자신을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가길.
cf. 사순절 Day 3.. 십자가의 길은 무엇일까?
나에게 십자가는 무엇일까.
추가)
십자가는 부끄러움일까?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EBS 공감에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나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질문으로 바꿔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마주할수 있는 질문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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